지갑 ‘잃어버려’, ‘잊어버릴’ 뻔한 추억

e s s a y 2007/07/19 20:56 posted by 곱씹다

심란한 일요일 오후, 머릿속이 복잡해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드러누워 이것저것 끼적이며 정리하려고.

그리고 그때, 구입할 도서목록을 적어 지갑에 넣어둔 쪽지가 생각났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에 이불까지 칭칭 감고 늘 지갑을 두는 서랍으로 손을 뻗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갑은 ‘부재중’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에 이불을 내팽개치고 지갑을 찾아 나섰다.

지갑을 ‘잃다’

가방을 뒤지고 어제 입은 옷을 확인해봤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을 시작으로 이불 속, 신발장,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지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변기를 세면대로 착각하고 면도기를 던지는 나이기에 집안 곳곳을 살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아버지 차를 주차하면서 보조석 의자에 뒀던 지갑을 윗도리 주머니에 넣은 기억이 떠올랐다. 중요한 ‘단서’였다. 일단 집 앞에 세워둔 차로 달려가 차내를 ‘수색’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시 지갑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제 남은 건 집 밖뿐.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오는 20여 미터 사이에 지갑을 떨어뜨린 게 아닌가 하는 부정하고 싶은 확신만 들었다. 하지만 그 짧다면 짧은 골목길에는 바닥에 코를 박고 쳐다봐도 지갑은커녕 평소와 달리 쓰레기도 없이 ‘깨끗’했다.

순간 ‘새 학기를 맞아 책을 사려고 넣어둔 고액의 돈’과 ‘이따금 아버지 차를 운전할 때 기름을 넣으라고 받은 신용카드’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고교시절 이후 최근 5년 여간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이구나’ 하는 직감마저 스쳤다.


우산도 쓰지 않고 지갑의 행방을 추적하다 머리와 옷은 이미 젖어 있었고, 답답한 마음에  잠시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문과 의자 사이에 끼어 살짝 고개를 내민 것, 그토록 찾아 헤맨 지갑이었다. 장장 두 시간 여동안 찾은 지갑은 그렇게 ‘불쑥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지갑을 집어 품에 안았다(‘세게’ 끌어안았다). 비 내리는 날 문틈에 끼어있어 축축해진 지갑을 그보다 축축해진 내가 두 손에 꽉 쥐고 집으로 ‘복귀’했다.

추억을 ‘찾다’

문득, 간절했던 마음만큼 지갑 속에 뭐가 들어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사실 다른 물건에 비해 유난히 지갑에 ‘무심’해 좀처럼 살피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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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갑 속에 들어 있던 '별의 별것'들. ⓒ 스폰지


지갑 속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봤다. ‘책값’ ‘문화상품권’ ‘도서목록이 적힌 쪽지’ ‘현금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생증’ ‘교통카드’ ‘복사카드’ ‘이동통신사 회원증’ ‘병원 진료예약증’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턴기자 명함’ 등은 당연히 알고 있던 것.

하지만 뒤이어 잊고 있던 추억 어린 내용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친구 연인에게 1000일 선물로 케이크를 사주며 만든 ‘OO제과 적립카드’(‘내 탓’은 아닌지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날 헤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처음으로 반지를 선물하며 만든 ‘골드OO 적립카드’. 처음 간 복합상영관에서 신기한 마음에 무작정 만든 ‘OOO 회원카드’.

추억에 잠긴 것도 잠시. 적립·회원카드 사이 나온 한 장의 명함은 ‘민망’하게 했다. ‘입구에서 21번을 찾아주세요, OOO 관광 나이트클럽 태수’. 지난 연말 친구 생일축하파티에 갔을 때 받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명함이었다(춤을 못 춰서 나이트클럽을 즐기지 않는다. 믿어 달라). ‘이런 걸 왜 여태껏 지갑 속에 고이 모셔뒀던 건가’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심지어 뒤이어 나온 물건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담뱃갑 반만 한 크기에 분홍색으로 포장된 ‘낯선’ 물건. 내용물이 ‘꿈틀’거리는 게 뭔가 짐작이 간다 싶던 그 물건은 포장에 적힌 영어를 읽고 나서야 온전히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OOOOO Condom for beautiful sex' 특별한 영어 독해력 없이도 ‘피임구’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오래 전 무심결에 지갑 깊숙이 넣어뒀던 것인데 잊어버린 채 지금껏 가지고 다닌 것이다(하늘을 우러러 '고기 한 점' 부끄럼이 없기에 공개한다).

얼마나 지갑에 무심했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명함과 피임구가 나란히 들어 있는 지갑이라니, 지갑에 소홀한 ‘죄’로 자칫 사생활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때론 잃으면 잊고, 늘 잊으면 잃는다


어쨌건 돌아온(?) 지갑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환영의 박수도 보낸다. 정말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돈이나 신용카드, 신분증 따위 말고도 잃어버렸을 것이 참으로 많았겠으니 말이다. 물건도, 그 물건에 알알이 박혀있는 추억도.

많은 사람이 말할 때 ‘잃다’와 ‘잊다’를 구분해 쓰지 않는데, 이를테면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을 말할 때 ‘휴대전화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때론 잃어버리면 잊어버린다. 물론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7년 3월4일 작성. 

  1. Commented by Favicon of http://www.pandawill.com/computer-laptops-c175.html BlogIcon laptop accessories at 2011/10/08 11:31

    이 시스템이 지금 당장 필요하단 말이요! 프로그래머를 열명 투입하면 어떻겠소?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