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성의 <성원>
오랜만에 비디오 가게로 향한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이 설렌다. 사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화 파일을 내려받거나, 디브디를 소장한 친구에게 당당히 빌려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그렇게 만나고 싶지 않다. 어느덧 7년 만의 ‘재회’가 아니던가. 왠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만나야지만 아련한 옛 추억을 오롯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열일곱 사춘기 소년이었다. 어느 무료한 주말 친구와 함께 찾은 극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사전에 관람할 영화를 정하고 극장을 찾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기분 따라 찾은 극장 앞에서 영화를 골랐다. 또 그맘때만 해도 나는 ‘청룽(성룡)표 액션’이나 ‘장만위(장만옥)표 멜로’, 다시 말해 ‘홍콩영화’ 관람만을 고집했다.
그런데 그날은 극장 간판에 그려진 한 앳된 여인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여인은 장만위 뺨치게 하얀 얼굴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여인이 그려진 간판의 영화가 그날 극장에서 상영하는 유일한 홍콩영화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망울’에 이끌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 제목은 '성원'. 영화를 보기 전. 그냥 전형적인 홍콩 멜로영화가 아닐까 예상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고 한 시간 반이 한 잔 두 잔 마시다 바닥을 드러낸 소주병처럼 순식간에 달아나고 말았다. 그만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영화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보다는 영화 속 여자주인공 ‘초란(장바이즈 분)’에게 빠져들어 있었다.
영화 '성원'의 내용은 시각 장애와 언어 장애가 있는 양파(런시안치 분)와 간호사 초란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어린 시절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양파는 병원 자료를 점자로 기록하며 병원 한쪽 숙소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밝고 따듯한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한 여인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안과 간호사 초란이다.
어느 날, 양파는 야간 근무를 가는 초란을 데려다 주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다. 죽은 양파는 하늘나라로 올라가는데 우연히 영혼들이 지나치는 중간 지점에서 백만 번째 손님으로 당첨된다. 그래서 한 가지 소원을 이룰 기회를 얻은 양파는 초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자 이승으로 내려온다.
한편, 양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퍼하던 초란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사랑 고백도 못하고 그를 떠나보낸 것에 후회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초란은 주위에서 양파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느낀다.
마침내, 양파와 초란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지만 정작 헤어져야 할 시간을 알리는 유성 쇼의 시작이 머지않았다. 이별의 순간을 앞두고 예전에 별똥별을 함께 보며 빌었던 그와 그녀의 두 번째 소원이 모두 ‘그, 그녀와 함께 평생 사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무심하게도 유성 쇼가 시작하고 둘은 가슴 아픈 이별을 맞이한다.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미안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지만 생기발랄한 초란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특히 양파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 떠나보내며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남자주인공 양파로 '몰입'됐고, 그러한 착각은 영화가 끝나고도 이어졌다.
영화는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고 초란에 대한 내 감정은 영화 밖 현실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짝사랑'이었다.
'코스튬플레이(만화나 게임의 주인공을 모방하는 취미 문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사랑한 나머지 만화 속 여인의 사진을 다이어리에 지니고 다니는 친구들을 '비웃던' 사람이 나였다. 그랬던 내가 유사한 감정에 빠지고 만 것. 이후 나는 초란의 사진으로 방을 도배했고,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꾸곤 했다.
그렇게 홀로 가슴앓이를 하던 어느 날, 스스로 되물었다. 영화 속 여자주인공 초란으로 분한 배우 장바이즈(장백지)의 ‘미모’에 반해서 ‘장백지’라는 배우에게 빠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바이즈라는 배우에 대해 알아보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도 찾아서 봤다.
하지만 영화 '성원' 밖의 장바이즈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아니었다. 장바이즈라는 배우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이 아닌, 머리로 느끼는 아름다움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사랑한 여인이 '성원' 속 ‘초란’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점에서도 언뜻 보면 성원 속 초란의 모습 또한 배우 장바이즈의 연기니 장바이즈의 한 모습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배우 장바이즈는 결코 ‘팔각형 젤리’와 ‘색소폰 소리’를 좋아하는 초란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일곱 소년은 오랜 시간 초란에 대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아야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열병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사춘기 시절 짝사랑한 그녀는 지금까지 내 ‘이상형’으로 녹아들어 있다.
사실 그동안 영화 '성원'을 다시 보지도, 영화 속 초란과 다시 마주하지도 않은 데는 첫사랑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초란을 다시 만난 것이다.
초란을 다시 만나고 나는 열일곱 소년이 된 듯 애틋했던 옛사랑에 설레기만 했다. 이제 소년은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됐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했다. 누군가 첫사랑이 애틋하고 짝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아직 청년은 영화 밖의 초란을 기다린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6년 6월10일 작성.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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